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 역시 따라오게 마련이다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 역시 따라오게 마련이다.

행복이나 사랑을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것처럼 좋고 나쁨도 그 크기에 상관없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을 때 느끼게 되는 마음의 느낌이 바로 그 사람의 행복의 척도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을 되돌아 볼 때는 언제나 기뻤을 때보다 슬펐을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회적으로 명예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딴 사람조차,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내게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이 열이라면 그 열 모두를 충족할 만큼 모두 채우기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원하고 바라는 것 중, 어느 정도 한계를 지을 필요가 있다.

애당초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독과 같아 그 독을 완벽하게 채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꽉 찬 100%보다는 조금 부족한 60~70%가 더 행복할 런지도 모른다.

등산을 하면서 힘들게 정상에 섰을 때, 사방이 꽉 막힌 평평한 정상을 보면 오히려 가슴이 더 답답하고 허망한 기분을 느낀다.

정상에 올라도 그 정상이 자신이 바라는 정상이 아닐 수도 있고, 노력에 비해 성과가 미미한 보잘 것 없는 결과를 얻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려도 오히려 과정이 정상보다  더 행복했음을 자각할 때도 있다.

그래서 정상은 행복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욕망이라는 것은 모자람 없이 꽉 차야하고 끝을 보지 않고는 되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는 그 순간 그 잘못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항상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웃기게도 같은 사람이 병도 주고 약도 주는 이중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잘못을 보고 모질게 비난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를 해 왔을 때 공연히 머쓱한 경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나 역시 살면서 누군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보다는 기쁨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항상 나의 기분에 치우쳐 약보다는 병을 주는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스스로도 그리 모진 사람이 아니라 여기면서 살아왔건만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작은 일도 참지 못하고 불쑥 화를 내고는 한다.

그리고 난 뒤 후회하면서도 그렇다고 사과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것이야 말로 나의 약점을 키우는 지름길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자존심마저 굽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하는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어도, 사람은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하지 않는 한 한번쯤 자신의 잘못을 수정할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행동하여 오히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도록 않도록 유념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성급한 사과가 독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잘못을 알았을 때 바로 용서를 구하는 용기를 가져라.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도 못 막을 수도 있음이다

이처럼 함께 산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병과, 사과와 용서라는 약을 함께 주고받는 과정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비단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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