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잊어진 사람이라 한다


난 12월이 되면 한해를 정리하듯이 전화번호를 정리하곤 한다.

주로 바뀐 전화번호를 수정하거나 인사발령으로 관계가 끊긴 거래처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는데 그친다.

그렇게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넘기다보면 자연스럽게 1년 동안의 자신의 인간관계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다.

어떤 전화번호에는 아쉬움이, 어떤 전화번호에는 그리움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전화번호를 지우듯 그 사람 역시 나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잊어진 사람이라 한다.

잊어지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지우는 것도 슬픈 일이다.

지워진 전화번호에는 분명 순간일지라도, 서로의 마음을 애끓게 했던 소중한 감정들도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그대로 보관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언젠가 어디에서 우연히 마주칠지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올 해는 그동안 사용하던 011,016, 017, 018 번호가 010으로 통합되어 전화번호가 유난히 많이 바뀌었다.

지우고 싶지 않아도 지울 수밖에 없는 몹쓸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까지 011번호를 쓰고 있는 나로서는 이번 010으로의 통합이 야속할 뿐이다.

개인재산인 전화번호를 단지 정책이란 명목 하에 좌지우지하는 정부의 근시안적인 태도가 못마땅하다.

그 어찌 추억을 단지 숫자로만 재단할 수 있을까?

전화번호의 저장은 단순히 숫자의 저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전화번호 안에는 그 전화번호 주인공의 얼굴이나 모습은 물론 함께 생활했던 그동안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떤 의미에서 전화번호는 그 사람과 나와를 이어주는 촉매제요 연결고리인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번호가 바뀌어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점이 끊어진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전화번호는 어느 것보다 더 소중한 재산인 것이다.

나 역시 핸드폰에는 만나고 싶은 그리운 사람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전화번호는 번호가 바뀌었는지 아니면 이미 사장된 전화번호인지 통화가 되지 않는다.

생각날 때마다 가끔 통화버튼을 눌러보지만 항상 묵묵부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전화번호를 지우고 싶지 않다.

왠지 언젠가는 통화가 될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지근에 그 사람과 친한 사람이 있어 알고자 한다면 바뀐 전화번호를 알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러면 내 가슴에 남아있는 그리움이 송두리 채 날아가 버릴 듯한 기분에 차마 그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전화번호는 단순히 숫자라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추억이요 그리움이다.

어쩌면 단순히 전화번호를 지우는 행동이지만, 그 전화번호 주인공과 함께했던 기억과의 조우이기도 하다.

그래서 막상 지우려하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전화는 직접 대면하여 하지 못하는 말이나 마음을 전할 수 있게 한다.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은 물론, 미안하다든가 용서해달라든가 하는 사과의 말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이런 진심어린 통화를 통해, 그동안 원망이나 서운했던 감정들을 덜고, 더 좋은 관계로 발전시킬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전화번화가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말은, 그만큼 그 사람의 인간관계가 폭넓다는 의미의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전화번호에 그 사람의 삶이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를 지운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과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단절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게 소용되지 않는다고, 혹은 원망이나 미움으로 서둘러 전화번호를 삭제해서는 안 된다.

그 전화번호에는 단순히 그 사람의 기억뿐만 아니라 나의 기억도 함께함으로 가급적이면 몇 번이라도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나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전화번호보다는, 평소 편안하게 통화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들 중 하나는 가족관계다.

만일 내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제일 먼저 달려와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노동을 통해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금전적인 도움은 사전에 아내의 동의 없이 선뜻 도와주기란 어렵다.

아무리 내가 번 돈이라 할지라도 그 돈이 혼자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라면 더더욱 동의가 필요하다.

심정적으로야 누구보다도 빨리 도움의 손길을 주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자랄 때야 서로 돕고 살지만 결혼 후 살림을 나 가정을 이루게 되면 소중한 타인이라고 믿는 것이 좋다.

그래야 부모라서, 형제자매라서 기대고 의지하는 나약함을 고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갑자기 형제자매 중 누군가가 죽었다고 하자.

과연 누가 가장 슬퍼할까? 

아마 부모나 형제자매는 아닐 것이다.

누가 눠라 해도 가장 슬퍼할 사람은 배우자며 자식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상을 통해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기에 서로의 정이 가장 돈독하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일적으로나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은 <이웃사촌이 낫다.>라는 말처럼 부모나 형제자매는 제3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도 젊었을 때나 하는 말들이다.

늙어 경제적, 육체적 능력이 사라지면 그래도 도와줄 사람은 피붙이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가급적 스스로의 능력으로 억척스럽게 삶의 파고를 헤쳐 나가야 한다.

가족이란 울에서 함께 자란 사람이라면 도울 일이 있으면 응당 먼저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살지 않는 가족의 도움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둬야 한다.

내가 편 하려고 도움을 바라는 짓은 정말 피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자라면서 부모나 형제자매의 도움 하나 없이 자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도움을 생각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준다 한들 아깝지 않아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가정을 이루고 가족이 생기면 먼저 내 가족부터 챙겨야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예전의 도움을 기억하면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내 가족이 우선인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네 생활이기 때문이다.

미워서가 아니라 아까워서가 아니라 내리사랑의 본능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비롯하여 형제자매는 소중한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참견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그 사람의 삶을 지켜보고 기억해주면 된다.

그러므로 내게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내가 먼저 다가서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빨리 사과하고 늘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라.

피는 같을지라도 생각이나 가치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단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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