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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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누군가를 만나고 또 그 누군가와 헤어진다.

만날 때처럼 반갑게 헤어지기를 원하지만 이별은 언제나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사람은 만나는 순간부터 관계가 만들어지고 이해가 얽혀가듯, 정 역시 서로의 가슴에 소리 없이 쌓인다.

단순히 친분이나 친목으로 머물지 못하고 함께 있으면서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정의 바다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관계는 정을 만들고, 정은 욕망을 만들고, 욕망은 이해를 만들고, 이해는 다툼을 만든다.

이처럼 정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듯이 정도 흐르지 않으면 병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나누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정도 한사람에게 머물면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갈 땐 이별의 눈물이 된다.

그러나 정이라는 것은 핏줄이나 인연이 아닌, 서로를 위해 노력한 시간과 땀에 의해 흘러가야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할 것이란 착각을 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서는 후한 편이다.

내 삶의 주체가 곧 나일 수밖에 없기에 자신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으면 아마도 사람은 한순간도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사랑도 우정도 일도, 심지어 그 결과로 얻어지는 좌절이나 실패까지도 그렇다.

좋은 결과는 내 덕이고, 나쁜 결과는 남 탓이 정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자기합리화를 통해 스스로를 미화하고 포장하여 삶의 의미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사랑하기 전에 이별을, 일을 하기 전에 실패를 생각한다면, 어느 누가 사랑을 하고 일을 하겠는가?

얻어지는 결과보다 그 일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마음이란 그릇에 담길 때 행복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선의로 한 일이라도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라는 법도 없고, 악의로 한 일이라도 꼭 나쁜 결과로 나타나는 것 또한 아니다.

이처럼 삶의 결과는 물질보다는 만족이라는 마음의 인정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타인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 즐거움조차 내가 받아들여야 함께 웃을 수 있다.

마음속에는 한줄기 슬픈 바람을 품고 있으면 웃는 표정조차 어색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나의 헐벗음을 채우려는 마음의 발버둥이다.

누군가에게로 흘러가야 함에도 흐르지 못하고 좁다란 가슴에 막혀 저 혼자 아파하고 외로워한다.

만남이나 이별에 대한 강박관념에 미리 멈춰버린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고맙다. 감사하다. 미안하다.

이런 말일수록 그 말이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가슴속에서만 남아 있다.

진정 소중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의 울림일지라도 그 울림이 가슴속에서만 머물면 그 누가 알기나 할까?

웃어야 즐거운 줄 알고 울어야 슬픈지 알듯이, 자신에게 가장 귀중하고 비싸고 커다란 것을 나눠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모자라고 조금은 자존심 상해도 그랬으면 좋겠다.

몸이 바쁜 사람이 가장 능력이 많은 사람일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능력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바쁘게는 사는데 정작 자신의 삶에는 그리 보탬이 되지 못하는 그런 삶 말이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기에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경험이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만큼 어른들의 삶의 노하우가 아이들에게 그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있어 어른은 단지 돈을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어쩌면 어른들이 완고해지는 것은 경험의 산물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수록 경험보다는 현재의 가치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고의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

어쩌다 한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눈에 잘 보이지만,

반면 그 좋아함이 지나쳐 눈을 가리게 되면, 그 사람이외에 다른 사람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듯이 융통성을 잃기 쉽다.

그래서 저 혼자 외로워지고 서글퍼지는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2년 생명표>에 의하면, 무병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나이가 남자는 65세 여자는 67세라고 한다.

우리 국민의 평균 기대수명 81.4세에 비해 거의 15년 이상을 병든 상태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돈도 돈이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저 혼자서는 자신의 병든 몸조차 추스를 수 없음을 반증하는 통계이다.

그만큼 늙어갈수록 나와 다른 생각이나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 이외의 다른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들 속에 섞여 살 수 없다.

내게 힘과 능력이 있고 건강할 때는 함께하려고 애쓰지 않다가,

병들고 아플 때 함께하자고 하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흔쾌히 응하기란 쉽지 않다.

평소에 조금씩 다가가 생각과 가치를 소통할 수 있어야 서로가 필요로 할 때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다.

늙어갈수록 한곳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된다.

<늙으면 아침잠이 없다>라는 말은 그만큼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도 몸도 마음도 젊었을 때보다 더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야 한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 것처럼 부지런하게 살면 몸에 병과 같은 나쁜 것들이 들어올 틈조차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를 찾는 사람은 그리 없을지라도 찾아갈 사람이라도 많아야 마음이나 몸이나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후회도 되고 미련도 남지만, 다시 산다한 듯 그리 달라질 것 같지 않다면 차라리 지금 조금 모자란 듯 사는 삶이 더 좋지 않을까?

근래에 모임이나 회식자리에 갔다가 일찍 돌아오는 나를 보면서,

조금은 안쓰럽게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이  위로가 되기보다는 도리어 가슴 한쪽이 시리다.

이미 비켜선 시간 뒤에 홀로 남아 허우적거리는 삶을 지탱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눈이 있어도 보려고 해야 보이고, 발이 있어도 걸으려 해야 걸을 수 있듯이, 스스로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욕심이란 놈은 몸과 마음의 성장보다 훨씬 더 빨리 자라나는 것 같다.

늘 배 곯고 자랐던 어린 시절만 해도, 어찌 한번 마음껏 먹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젠 더 좋은 옷을 입지 못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안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난 욕구불만에 쌓여 사는 것일 게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이라는 길을 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작정 그 길을 걸어갈 수는 없다.

어떨 때는 뛰어서 가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쉬엄쉬엄 걸어 갈 때도 있다.

뛰거나 걷는 동안은 목적지가 항상 눈앞에 있는 것 같아도 막상 다가서면 더 멀리 도망쳐버린다.

그렇게 인생의 목적지는 생각이 자람에 따라 변해가는 것 같다.

뛰어가는 것이 좋은지 걸어가는 것이 좋은지 그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바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둘러 뛰어갈 것이고, 여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천히 걸어갈 것이다.

서둘러 뛰어가노라면 주변을 돌아보기 어렵고, 반면 천천히 걸어가면 때를 맞추기 어렵다.

이처럼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 또한 생기는 법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 성공이란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잃는 것을 최소화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난 요즘 왜 사는지 물어보고 싶다.

누구 말마따나 숨을 쉬고 있으니까 그저 살뿐인 것 같기도 하다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그 하루가 삶에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란 흐름에 동승하여 사라지는 기분이다.

무슨 의미를 찾는다거나 누구에게 도움을 준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오히려 이렇게 존재가치 없이 방관하며 사는 게 차라리 서로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때로는 그런 무기력함이 싫어 기분전환이라도 할라치면 도리어 탈이 나고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활력이나 즐거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을 추스르기에도 버겁다.

젊었을 때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했지만, 근래에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모두가 그저 그런 사람으로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것저것 따져보게 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어떻게든 그 이유를 받아들이고 싶어서다.

사람은 현재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설령 그것이 나중에 잘못된 선택이 되어 후회로 남을지라도 말이다.

하루하루의 기분이나 생각이 다르듯 지식이나 경험이 성장함에 따라 옳음이 달라질지라도,

사람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현재의 가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욕망이란 이름으로 매도될지라도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이렇게 삶에 더해지는 것보다 덜어질 때가 더 많다.

욕망 하나를 채우면 또 다른 욕망이 어느 틈엔가 나타나 아우성부리 듯 그 자리를 채워버린다.

그래서인지 몸이 위험에 처할 때는 마음이 편한데, 오히려 몸이 편할 때는 마음이 아프다.

이와 같이 욕망이 곁에 머물러있을 때는 만사에 의욕이 넘치는데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기력감만 남는다. 

그래서 욕망은 삶의 의미요 돌파구인 것이다.

가능하면 한 곳에 머물러있지 말고 바쁘게 움직여라.

오늘 내가 움직이고 걸어간 공간만큼 내 삶도 넓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자신의 생각 안에 자신을 가두고 움직이기를 게을리 하면할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후회뿐이다.

그러므로 욕망을 줄이거나 없애려는 노력보다는 그 욕망이 옳게 자라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더하는 일임을 마음 깊이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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