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쩔 수없이 누군가를 그리며 사는 것 같다



향기가 짙은 사람일수록, 사람을 물질적으로 구별하지 않으며, 친분으로 가리지 않는다

사람은 어쩔 수없이 누군가를 그리며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더 자신과 어울릴 수 있는 마음이나 대화가 통하고 일상의 생활패턴이 비슷한 사람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나와 통해도 자주만나지 못하면 그 친분은 오래가지 못하니까 말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자주 만나지 못하면 만나도 어색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사람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현재만 기억하고 사는 사람들 같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또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

그동안 주변사람들로 받았던 도움이나 사랑을 갚기는커녕 가능하다면 더 이용하거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을 당연시여기고 산다.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색깔로 스스로를 덧칠하면서, 어찌 그 몸에서 포근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기를 바랄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갖지 못하는 것들을 갈구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머니처럼, 누님처럼, 때로는 동생처럼 마음으로 감싸주고 보살펴주는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언제 만나도 마음 편하고 무엇인가 의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이 주변에 많을수록 그 사람은 행복하다.

사는 것에 너무 집착해 사람을 이용하려 들면 그 사람은 항상 외로울 수밖에 없다.

늘 주변에 존재하기에 사람이 흔한 줄 착각하고 살지만, 정작 마음에 의지가 되는 사람은 적다.

그것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 너무 자신의 기준으로 만나려하기 때문이다.

내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나뿐만 아니라 주변사람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남이 가지지 못한 독특한 매력이 있어, 주변사람 모두이 선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작은 행동조차 화들짝 반응하고 귀 기울이게 되고, 길을 걸을 때도 대화를 나눌 때도 늘 옆에 가까이 붙어있고 싶고,

함께 있으면서도 무엇인가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미련을 갖게 되는 것이다.

헤어져 집에 돌아와도, 이상하리만치 늘 그 사람이 생각나고 함께 무엇인가를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렇듯 그 사람의 향기가 나의 일상 속에 스밀 때 그 사람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은 있다.   이것이 소중함이다.

사람의 향기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지식이 높고 명예가 높아도, 그것을 자신만 끌어안고 주변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내가 가진 것들을 주변에 나눌수록 그 향기는 더욱더 짙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늘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눈치를 살핀다.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처세라 믿으며 그만큼 세간의 평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힘 있는 사람에게 왠지 잘 보일려고 갖은 아부와 애교를 부리고,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물질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혜택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바라는 나의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야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난 요즘 가급적 가슴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노력한다.

혹여 뒤틀린 시선을 갖게 될까봐 선입감을 배제하고 작금의 상황만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그 사람에게 해줬던 것들을 기억하기보다는, 그 사람으로부터 받을 것들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것은 철없는 시간을 넘어 오십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함께 해줬던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안 탓이다.

사람의 향기가 짙은 사람일수록 사람을 물질적으로 구별하지 않으며 친분으로 가리지 않는다.

우리네 인생에서 커다란 행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커다란 행복일지라도 이어질 수는 없다.

달도 차면 기울듯이 행복한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소한 행복한 그렇지 않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쩌면 매일매일 맛볼 수 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나 서로 나누는 이 모든 것들이 다 행복일 수 있는 것이다.

꼭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아야 행복하다면 인생에 있어 그런 행복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루하루 건강한 삶을 살면서 때로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도움을 주기도하면서 정을 주고받는 이 모두가 행복한 일일 것이다.

사소한 일상에서 얻는 기쁨이나 웃음과 같은, 작고 따뜻한 감동이 바로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언제부터 우린 좀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발악하듯 사는 것 같다.

그저 남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지나치도록 생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이것저것 따져 계산해보고 위험성이 있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난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대부분 때늦게 후회를 하거나 욕망을 이기지 못한 내 자신이 미워 스스로 내 가슴에 상처를 만들곤 한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아파서 어쩔 줄 모른다.

이젠 나 나름대로 어느 정도 삶에 대한 노하우가 생겨서인지, 요즘은 가급적 하루하루를 긍정적이고 즐겁게 보내려고 하게 된다.

아등바등 기를 쓰고 살아도 내가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음을 깨달아서인지도 모른다.

마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아버지의 지난 세월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내가 잠든 방 주변을 종종거리며 깨우시던 아버지의 헛기침소리마저 그립다.

이런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바로 삶이 주는 행복이 아닌가 싶다.

완벽하게 자신과 닮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군가와 늘 함께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외로운 존재다.

더 사랑하지 못함이, 더 행복하지 못함이, 더 많이 가지지 못한 부족함이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나 나의 모자라고 부족한 것들을 채워가는 것은 대부분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늘 곁에 존재함에도 쉽게 무시되는 것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희생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람이든 시간이든, 아니면 내 자신의 다른 그 무엇이든, 희생을 딛고 일어서면 언젠가 후회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을 위해 차려놓은 밥상일지라도 다 입맛에 맞지 않듯이 내 입맛에 따라 사람을 가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참을 때 참지 못하고, 여유 있을 때 아끼지 못하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과 함께 하지 못한다.

떠난 사람은 추억으로, 남은 사람은 일상이란 삶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늘 큰 것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작금의 일상에서도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더 큰 행복을 찾아 떠나곤 한다.

동화 <파랑새>에서 보듯이 행복은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의지와 노력에서가 아니라 우연처럼 마음 한 구석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다.

 이렇듯 나 역시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런 사소한 것들을 통해 삶을 위로받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 같다.

만족이라는 것은 극히 자의적인 해석이다.

만족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모자람이 없이 마음이 흡족한 상태>을 일컫는 단어다.

그러나 현실 상황에서 모자람이 없는 상태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어쩌면 생각이나 행동조차 하지 않고 머무는 순간은 찰나(刹那)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만족은 <자신이 지금 처한 현실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이 느끼는 감정의 이완상태>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늘 같은 얼굴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람은 화나면 표정이 굳어지고 기쁘면 입가에 웃음을 짓게 됨은 당연한 현상이다.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음에도 굳이 말로 표현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행동이다.

그렇다고 항상 그 사람이 원하는 얼굴만 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는가?

누굴 배려한다고 너무 앞질러 가다보면 도리어 그 배려가 간섭이 될 수 있다

내가 요즘 바라는 삶은 욕심이 아닌 자연스러움이다.

싫으면 조금 욕을 먹더라도 마음이 가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조직이나 사회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마음속으로 거부하면서 체면치레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내가 원하고 바란다고 해서 모두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행한 뒤 느끼는 마음의 불편함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차피 얻는 것이 있으면 반대급부가 필요하였음은 그동안의 삶을 통해 충분하리만큼 학습하지 않았는가?

마음의 불편함을 무릅쓰지 않아서인지 의외로 여유로운 시간이 더 많아졌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틈틈이 독서나 글도 쓰고,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가족들을 함께 하는 시간도 늘어난 것 같다.

모자라거나 부족함을 인정해서인지 굳이 그것을 억지로 채워 보여주지 않아서 좋다.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면 조금 비겁하게 살면 또 어떠랴?

자신의 속을 남들에게 다 보여주는 사람이 병신 취급받는 세상이다.

어쨌거나 요즘 너무 내 위주로 살아서인지 내 삶은 정적에 빠져 있다.

나이가 드니 감정이 메말라서인지는 몰라도 매사에 좋고 나쁨이 분명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열정적이고 자극적인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금의 생활이 변함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몸이 편해지니 예전의 그 어려웠던 시기를 잊은 탓이다.

나이를 인식한 즈음이면, 주변을 돌아보며 마음의 여유를 갖고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용기만 가지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기에는, 지금까지 살아 온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어쩌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시각이 더 나은 미래의 삶을 방해한다 생각하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천명의 인생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부족함을 채웠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부족함이 어려움이 있어야 서로가 서로에게 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함께 있음으로 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처럼 그동안의 내 삶이 물음표(?)였다면, 요즘은 그 물음표(?)마저 잊으려고 한다.

굳이 <나와 너>를 구분하기보다는, <우리>라는 틀 안에서 함께 버무려지고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내게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마저 내 맘대로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사정을 내세워 내키지 않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비록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처럼, 하루하루 행복하다는 착각일지라도 진정 내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꼭꼭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음식처럼, 고요한 일상 속에서 만족이란 단맛을 느껴야 한다.

올 해도 어김없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야 한다.

그 언제인가처럼 원하든 원치 않던 내게 주어진 시간은 변함없이 흐른다.

그리고 내게 쌓이거나 또는 얻어진 것만큼 잃어버렸거나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아쉬움과 그리움을 더해야 한다.

젊은 날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합리적이거나 계산적인 삶만 남아 정작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들조차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다.

사랑과 행복이었던 소중한 가치들을 이기심이란 허물로 덮어버리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비단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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