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가슴으로가 아닌 마주보는 사람이 되어 목청껏 불러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도 나 역시 가슴에 사는 사람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을 돌릴 수 없듯이 자라지 못한 내 사랑은,

이제는 동심의 애틋함이 되어 막연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요.

산다는 건 어쩌면 하루하루 내 가슴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쌓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인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버리면, 죽어 내 사랑의 흔적이 지워질 때까지, 그 사람을 가슴에 담아두기 위해서 그럴 겁니다.

죽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 뭐 그리 아등바등 살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요술방망이를 든 도깨비와 같아, 스스로가 만든 사랑의 함정에 빠져 그 누군가를 담아 둬야 직성이 풀리는 가 봐요.

또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죠.

하지만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살아야 합니다.

비운 그릇이어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랑 역시 그럴 겁니다.

새로운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또한 그 사랑마저 가슴에 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를 가슴에 담아둔다면,

어찌 그 사랑이 진실하다 하겠습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라면,

사람은 잊어도 사랑에 대한 기억은 가슴에 묻는 것이라는 걸 알 겁니다.

누군가를 가슴에 품으면 그 사람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지요.

설령 내게 남겨진 그저 상흔이고 눈물뿐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원망조차 할 수 없다는 걸요.

지금 다시 만나다해도 그 시절 그 모습, 그 감정이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에,

막연히 생각나는 기억일지라도 꼭꼭 씹어 삼키게 됩니다.

어쩌면 너무 고단해 잠을 이루지 못하듯,

가슴에 멍이 들어 더 이상 놓아주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내게 주어진 하루의 삶을 사랑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건,

아마 나의 가슴에 남겨진 그대에 대한 사랑의 기억은 영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면 조금은 이상할까요?

하지만 비슷한 크기를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런 모습이 남들 보기에도 좋고 스스로도 편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죠.

한때는 나 역시 다른 사람보다 무엇인가 다르고 우월해야 행복이라 여긴 적도 있지만,

이제는 마음 맞는 이웃과 어울려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란 걸 하루하루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내 능력의 한계를 자각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내 능력이 닿는데 까지 노력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남들보다 더 폼 나게 살고 싶지만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로 일확천금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더 많은 것을 얻을 방법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본 바탕이 어디 가겠습니까?

억지로 꾸미고 허세를 부려도 그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기 마련이죠.

사실 젊었을 때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다는 의미를 모르고 살았죠.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처럼,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재물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아쉬운 것들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노력하면 얻어질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좋다는 것을 말입니다.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는 말처럼, 노력 없이 얻어지는 일확천금은, 오히려 그동안 함께 삶을 나누던 사람들과의 화목을 헤치고, 서로 간에 만나고 싶어도 찾아가지 못하는 아쉬움들이 가슴에 쌓이면, 은연중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는 동안 그저 굶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모의 이런 소박한 꿈처럼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에겐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지고 갈 재산이 아니라면, 차라리 건강과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죽어서 남은 가족에게 반목을 불러올 재산이라면,

차라리 살아 있는 동안 행복과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여지는 것들이 진정 나의 재산이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모임에 나가보면 만나는 사람 모두는 마치 자신이 최고인양 살아갑니다.

물론 나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비교하여 열등감을 느끼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양심이란 저울의 무게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됩니다.

내가 행복해야 행복하고 내가 아프지 않아야 아프지 않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남의 눈치를 살피고 움츠려들기 보다는,

어깨를 피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내 힘으로 노력하여 얻은 것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혹여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더라도 잊지 말고 갚으면 됩니다.

얄팍한 마음으로 그저 도움을 바라거나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나쁘지, 그러하지 않을 마음의 각오만 있다면 스스로 당당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내 욕심 때문에 이용하지 않고, 생긴 대로, 주어진 여건대로 최선을 다해 살면 결코 후회를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거리낌이 없는데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림자 역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을 검색하기만 해도 원하는 많은 정보가 쏟아지지만, 그것을 직접 찾지 않으면 그건 그냥 창고에 보관된 물건일 뿐이죠.

사랑도 행복도 결국 마음만으로 하면 얻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진정 내가 행복하고 싶다면, 내 등 뒤의 그림자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싶다면, 주가 되는 나를 움직여야 합니다.

사람을 망각의 동물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곧잘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해 과신하거나 모자람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을 곧잘 저지르곤 하지요.

함께 자란 어린 시절 친구에게서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용하려 드는 것이 사람입니다.

나무가 흔들리지 않으면 나무의 그림자 역시 움직일 수 없듯이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문제의 원인 자체도 존재할 수 없음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

부모에게 받은 것이 어찌 영육뿐이겠습니까? 또한 아픔의 회초리만 들었겠습니까?

튼튼한 몸 안에 가득 찬 넘치도록 가득한 사랑과, 회초리의 날카로움 뒤에 숨겨진 눈물을 말입니다.

그저 내 기분 내 뜻과 다르고, 일상을 함께 보내지 않는다고 저 혼자 외면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요?

결국 잘못의 시작도 자신이요, 종착지 역시 자신인 것입니다.

우린 산 위에서 굴려오는 눈 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비록 주먹만 하지만 굴러갈수록 더 커지는 눈 덩이 말입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처음에 갖고 있는 것들이 커다란 눈 덩이처럼 자라 있어야 합니다.

작은 나무가 자라 더 크고 잎이 무성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듯이 말입니다.

스스로 보잘것없이 여기지 말고 스스로 존귀할 수 있도록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지 않으면 비록 커지더라도 그 등치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자라지 않습니다.

먹을 것을 찾고, 입을 것을 만들고, 명예나 성공의 초석을 다지는 것 역시 내가 해야 합니다.

뻐꾸기처럼 남이 만들어 놓은 둥지위에 알을 낳고 지켜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신이 아닌 그림자에게 먹혀버리고 마니까요.

그림자는 어쩌면 제 몸을 태워 숯이 되는 나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 조절이 중요한데, 너무 덜 타면 나무가 남아 연기가 나고 너무 타면 재만 남아 버립니다.

이처럼 본래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 역시 빛과 그림자를 적당히 품고 있어야 합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오히려 그림자를 삼키듯이, 우리도 죽어 육신을 화장하게 되면 저 스스로 불꽃을 피우는 매개체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그림자를 지워야 하니까요.

저마다의 뜻으로 삽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과 같으리라는 것은 자신의 착각일 뿐입니다.

무슨 역사적인 소명과 같은 거창함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버릴 것이냐는 바로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산의 정상이 어떤 형태를 갖고 있으며, 날씨는 어떻고, 식물은 어떻게 자라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의 정상을 경험한 사람만이 산을 지금 막 오르려는 사람에게 그 산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해 저지른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이해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아량입니다.

즉 강자는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것들을 그만큼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한계를 극복하고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도 강자입니다.

남이 모르는 새로운 정보를 알고 있거나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 역시 강자입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주먹이 세거나 덩치가 큰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 역시 그러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강자는 자신을 이겨낸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이런 사람의 주변에 늘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 가진 능력이란 그늘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를 대비하여 쌓은 제방은 결코 커다란 바위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바위의 틈을 메우는 건 자갈과 모래와 진흙을 함께 섞어 수없는 다짐을 통해야만 견고한 제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성공은 단지 자신만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성공의 밑거름이 된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량은 강자가 베풀어야 합니다.

같이 있는 주변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베풀어야 합니다.

가진 것이 더 많으면서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것은 가진 것이 많음에도 나누는 것에 인색하게 비춰져 스스로가 초라하고 어리석은 사람임을 자인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강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비단채

칼럼·단상·수필·사진·포토에세이·수필가 김진철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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