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달프게 끌고 가는 그리움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이 나에게서 멈추는 것이다.

그다지 마음 없이 지겹게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아는 사람에게 물건을 전해 줄 때 넋 없이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지겨운 느낌이 배어 있는 기다림 같다.

기다림이 그토록 간절한 것은 그리움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립다는 것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고, 그 시간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단축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에서 마음에는 응어리를 그리게 된다. 

그리움은 무엇일까.

가슴에 새겨진 불로 지져진 자국을 도려내지 못해 아지랑이로 계절에 관계없이 피어오르는 것일 것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멀어질수록 다가오게 되고, 꿈에라도 나타나 주기를 염원하는 그러한 것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만날 수 없는 그리움.


눈물로 호소해도 닦아지질 않은 영적인 그리움은 차라리 외로움이라 해야 할까.

테두리에 가친 그리움이 원래 의미의 기다림 같다.

사랑도 끝나지 않은 그리움은 살아있는 자 뿐 만 아니라, 그 주위를 애달프게 끌고 가는 그리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징표는 또 다른 한으로 승화되어 주위에 남아있을 것이다.

기다림은 세월의 풍파에 따라 격해지며, 애달픈 그리움으로 축적되어 간다.

30년만의 만남, 그것도 우연한 만남은 그리움을 이겨낸 통곡으로 다가온다.

이 통곡의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세월을 접어두면 그리움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이기도하다.

30년의 시간의 흐름을 영으로 만든 후에 기다려지는 만남도 통곡으로 세월 속에 잠겨 있는 의미를 풀어 내곤 한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는 같은 동네 친구와 헤어 질 때, 우리 30년 뒤에 우리 동네 성황당 나무 그늘에서 만나자라고도 지나가는 말로 약속하기도 한다.

기다림은 나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하는 정점이 되고, 그간 내가 너무도 잊고 살았던 대상에 대하여 하나 둘씩 헤아려 보기도 하는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 내가 좀 잘되어 만나야지, 그 친구는 나보다 잘 되어 있을까, 괜히 지나온 시간들이 자책으로 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오랜 기다림으로 만날 인연이 엉켜 나타나지 않을 때는 굉장한 외로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오늘 만나면 나의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고, 그 시간이 지금인데 나타나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 더 많은 궁금증이 생기게 되고 어떻게 찾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은 나에게는 무엇일까. 무엇을 기다려야 할까.

기다린다고 오기는 할까?

추상적인 기다림, 이것은 더욱 심신을 병들게 하고 삶의 목표를 잃게 하는 기다림이 될 수 있다.

대상이 없는 기다림, 이것은 외롭고 자신과의 싸움이며 내가 얼마나 버텨나갈 수 있나와 연관되어 있다. 

  


추상적인 기다림은 언제나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취업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결혼 할 수 있을까.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력을 하라고 하고, 준비를 하라하고, 목표를 세우라고 한다.

어쩌면 이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소원으로 바뀔 것이다.

기다림의 필요가 없어지고, 세월은 흘러가고, 시간을 막을 수 있는 장치는 더 없고. 그래서 기다림은 소원이 아니라 희망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아무도 나에게 기다림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내 자신이 사회의 구성원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기다림은 왜 자꾸 비켜 나가게 되는가. 나의 잘 못인가.

기다림의 상대어는 만남이다.

많은 종류의 만남 중에서도 그리움을 바탕으로 하는 기다림, 애가 타는 기다림은 사람을 훨씬 인간다운 경지로 승화시킬 것이다.

그 결과가 외로움으로 끝나는 기다림 일지라도 기다림 그 자체로써 나를 있게 하는 소중함이다.

물론 추상적인 기다림에서도, 나답게 기다리는 호연지기를 길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다림은 환희로 끝나야 한다.


비단채

칼럼·단상·포토에세이·저널리스트 김진철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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